[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생이 죽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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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형의 버팀목이 되어준 동생, 히데나가
동생 히데나가가 사망하자 평정심을 잃고 폭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오늘날 우리는 지근거리에서 직언하고 견제해 주는 자가 사라지면 ‘자기 확신’에 도취해서 폭주하다 패착을 두는 지도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일본 역사에서도 16세기 중·후반, 전국시대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년에서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평생 곁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던 동생 히데나가가 사망하자 평정심을 잃은 그는 가신과 친족을 숙청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등 폭주를 거듭한 끝에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번 회에서는 도요토미 형제의 흥망성쇠 과정을 소개하겠다.
“농사일을 접고 나를 도와다오”…형제의 의기투합
“동생아, 농사일을 접고 나를 도와다오. 내가 의지할 것은 핏줄인 너밖에 없단다”. 몇 년 동안 소식을 끊고 가출했던 형 히데요시가 어느 날 불쑥 집에 나타나 동생 히데나가에게 오와리(현 아이치현)의 맹주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다. 형은 장작 장사와 바늘 행상 등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노부나가의 애첩인 이코마 요시노의 눈에 들어 그녀의 천거로 노부나가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병졸을 지휘하는 무사가 되어 돌아왔다.
미천하고 궁핍한 가정에서 자란 히데요시에게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남동생 히데나가 밖에 없었다. 이런 형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농사일을 접고 형과 의기투합하여 형을 따라 집을 나섰다. 두 형제의 의기투합이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평정하여 천하 대권을 손에 넣은 도요토미 정권의 시발점이 될 줄이야 그 당시에는 그의 주군 노부나가는 물론이요, 본인들도 몰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 대권을 잡기까지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동생 히데나가. [출처 야후재팬 화상]
형이 곤경에 처할 때 구원투수로 나선 동생
히데나가는 1560년부터 1590년까지 30여 년간을 히데요시가 참전하는 전투에 동행하면서 형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며 형의 출셋길을 열어준다. 그가 출전한 첫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적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몰리자 적의 측면을 공격해 형을 구해준다.
히데나가가 무사로서 가장 돋보였던 활약상은 1570년의 ‘가네가사키성 전투’ 때였다. 노부나가는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 에치젠(현 후쿠이현)의 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에치젠 가네가사키성 침공에 나섰다. 그런데 돌연 동맹관계인 오미(현 시가현)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신을 하고 아사쿠라 측에 붙어서 후방에서 공격해 왔다. 전후방에서 협공당한 오다 군은 궁지에 내몰려 노부나가의 신변이 위험에 노출되었다. 노부나가를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후미에서 추격해 오는 적과 맞싸우면서 시간을 끌어줄 군사가 필요했다. 그 임무를 자신이 맡겠다고 자청한 히데요시는 동생 히데나가에게 가장 위험한 후미 방어를 맡기며 “노부나가께서 퇴각하는 데는 앞으로 4시간이 소요된다. 그때까지만 버텨다오”라고 명령한다. 히데나가는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노부나가를 무사히 생환시켰다.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 형제는 노부나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적군의 협공으로 위기에 빠진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목숨을 구해준 도요토미 형제. 이를 계기로 두 형제는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됐다. [출처 : 야후재팬 화상]
“히데나가는 형 히데요시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노부나가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리던 두 형제에게 어느 날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가 쿠데타를 일으켜 주군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혼노지의 변’). 두 형제에게는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히데나가는 우왕좌왕하는 히데요시에게 쿠데타군을 토벌할 것을 건의했다. 히데요시는 동생의 뜻에 따라 교토로 진격하여 미쓰히데를 진압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히데요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후에 전개되는 후계자 경쟁에서 라이벌 시바타 가쓰이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차례로 제압한다. 이로써 천하 대권은 사실상 히데요시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히데나가에게 자기 대리인으로서 전국의 다이묘와 교섭하고 아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는 다이묘들에게 그가 정권의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히데요시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인식을 심어주었다.
동생 사망 뒤에 ‘노망난 히데요시’의 폭주
1591년에 히데요시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던 히데나가가 와병으로 세상을 뜨자 히데요시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책사 센 리큐를 할복시키고 이듬해인 1592년 조선을 침공했다. 4년 후에는 후계자로 지명한 조카 히데쓰구를 처형하면서 그의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히데요시를 가리켜 “그가 노망났다. 히데나가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라며 히데나가의 사망을 아쉬워했다. 이런 와중에 히데요시는 2차 조선 침공인 정유재란 기간에 급사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의 와해는 동생 히데나가의 사망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진단한다.
한편 히데나가 가신의 가족사 ‘부코야와’에는, 히데나가가 사망하기 직전 병석에서 “대군을 이끌고 무력으로 외국을 침공하는 것은 폭거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싸우지 않고 교역을 넓히는 것이 부국으로 나가는 지름길이다”라며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에 반대 목소리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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