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에 눈길 쏠린 사이…말라카 해협 '통행료 논쟁'이 던지는 질문 [더 라이프이스트-이성득의 아세안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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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프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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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말라카 해협의 상선들 (출처: Flickr/dronepicr) 최근 푸르바야 유디 사데와(Purbaya Yudhi Sadewa)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비용을 부과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이 발언은 현재 세계 경제의 가장 민감한 지점을 건드렸다. 말라카 해협은 하나의 바닷길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의 또 다른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전 세계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에 따른 유가 급등과 물가 상승 압력에 직면해 있는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해협 리스크가 부각되니 시장과 주변국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지사다. 논란은 즉각 확산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주요 아시아 국가들도 우려를 나타냈다. 결국 지난 24일 수기오노(Sugiono) 인도네시아 외교부 장관은 “자유롭고 중립적인 해상 통로를 지지한다”며 통행료 부과 계획이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말라카 해협 논란이 던진 구조적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말라카 해협은 길이 약 800㎞, 가장 좁은 곳의 폭은 약 2.7㎞에 불과한 좁은 수로다. 그러나 세계 해상 교역량의 약 25~30%가 이곳을 통과한다. 에너지 측면에서도 동아시아로 향하는 중동산 원유의 상당한 비중이 이 해협을 지난다. 연간 수만 척의 선박이 오가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해상 통로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도 말라카 해협은 늘 통제와 경쟁의 대상이었다. 15세기 말라카 술탄국은 이 해협을 기반으로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한 이후 해협은 유럽 세력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경쟁했고,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계기로 영국이 해협 일대의 실질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이 지역을 장악한 것도 동남아 자원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이 컸다. 냉전 이후 말라카 해협은 특정 국가가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됐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따라 국제 해협에서의 통항 자유가 보장되며 현재까지 별도 통행료는 부과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항로 유지, 항행 안전, 해양 환경 보호, 해적 대응 등 관리 비용은 대부분 연안국이 부담해 왔다. 2000년대 초반 말라카 해협은 해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해역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2004년부터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 3국의 공동 해상 순찰 체계인 MALSINDO가 시작됐고, 이후 항공 감시 체계 ‘Eyes in the Sky’까지 구축되면서 해적 활동은 크게 줄었다. 다만 이러한 안전 확보와 항행 관리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일부 국제사회 지원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재정 부담은 여전히 연안국에 크게 쏠려 있다. 이번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의 발언에는 이 같은 구조적 맥락이 깔려있다. 인도네시아는 에너지 보조금과 무상 급식 정책 등으로 인해 재정 부담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국제 유가가 오르면 연료 보조금 지출이 급격히 늘어나는 구조다. 고유가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재정 적자 압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해협 관리에도 ‘사용자 부담 원칙’을 강조하는 문제 제기가 나온 셈이다. 중국의 전략도 중요 변수다. 중국은 자국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현재 구조를 오래전부터 전략적 취약점으로 인식해 왔다. 이른바 ‘말라카 딜레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미얀마 원유·가스 파이프라인, 파키스탄 과다르항, 동남아 항만 투자 등 다양한 우회 경로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대안들이 말라카 해협을 대체할 정도의 규모와 효율성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 항로로 거론되는 롬복 해협(Lombok Strait)과 순다 해협(Sunda Strait)에도 현실적 제약이 있다. 롬복 해협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 운항은 가능하지만 항로가 길어 운송 비용이 증가한다. 순다 해협은 수심과 항행 안전 측면에서 제약이 있다. 태국 남부를 가로지르는 ‘크라 운하(Kra Canal)’ 구상 역시 경제성, 환경 문제, 정치적 부담으로 장기간 답보 상태다. 결국 말라카 해협은 현재로서는 대체하기 어려운 핵심 인프라다. 특히 한국, 일본, 중국 등 동북아 주요 경제권은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의 상당 부분을 이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 해협의 통행 조건이 바뀌면 이는 곧 공급망 비용 상승과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논쟁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말라카 해협은 법적으로는 국제 해협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세계가 함께 이용하는 공공재 성격을 갖는다. 문제는 그 공공재를 유지하는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다. 지금까지는 연안국이 관리 비용을 떠안고 이용국은 비교적 자유롭게 혜택을 누리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정학적 리스크와 항행 안전 비용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 구조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는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과거에는 군사력으로 해협을 통제했다. 오늘날에는 인프라, 금융, 항만 투자, 국제 규범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한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해협을 둘러싼 ‘통제’와 ‘비용’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발언은 일단 철회됐지만 같은 논의는 앞으로도 다른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말라카 해협 문제를 호르무즈 해협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 신정일치 체제와 강력한 군부를 권력 기반으로 핵 개발 의혹까지 받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은 세계 경제를 볼모로 잡는 벼랑 끝 전술에 가깝다. 반면 말라카 해협을 관리하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국제 해상 질서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해협을 관리해 온 국가들이다. 이들이 제기하는 비용 문제는 전 세계를 위협하는 정치적 협박이라기보다, 안전한 항행과 원활한 해협 관리를 위한 서비스 비용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일방적 통행료 부과가 아니라 투명한 비용 공개와 정식 외교 절차다. 말라카 해협 인접국들이 항행 안전과 환경 보호, 해적 대응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지 국제사회에 설명하고 이용 국가들과 합리적인 분담 방식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보여 줬듯, 전략 수송로는 언제든 정치적 변수로 바뀔 수 있다. 말라카 해협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에너지 수송 의존도가 높은 한국 같은 나라는 이 문제를 단순한 동남아 지역 이슈로 볼 수 없다. 말라카 해협의 자유로운 통항은 우리 산업과 물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문제다. 이번 논쟁은 하나의 신호다. 말라카 해협은 여전히 ‘자유로운 바닷길’이지만, 그 자유가 아무 비용 없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게 됐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를 계기로, 전 세계 전략 해상 수송로의 비용과 리스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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