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근의 감각지능] DX와 디지털리트로핏(상), 감가상각이 끝난 설비에서 시작되는 경제학
작성자 정보
- 김프로 작성
- 작성일
본문
△오재근 코아칩스 대표
스마트공장과 디지털전환(DX)을 말할 때 사람들은 새 공장, 새 설비, 새 생산라인을 먼저 떠올린다. 최신 PLC·로봇, 클라우드와 AI가 연결되고, 대형 모니터에는 실시간 생산 데이터가 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 제조 현장은 그렇게 깨끗한 출발선 위에 있지 않다.
DX라는 개념을 오늘날 의미에 가깝게 2004년 처음 학술적으로 설명한 에릭 스톨터만과 안나 크룬 포르스는 DX를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삶 전반에 일으키거나 영향을 주는 변화'로 보았다. 즉 DX는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사람과 조직, 산업의 작동 방식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조 분야에서 DX는 어렵다.
장비는 살 수 있고 시스템은 구축할 수 있지만, 한 산업이 축적해 온 전문지식과 문서화된 형식지, 숙련자의 몸에 남은 암묵지를 데이터 기반의 전략과 운영체제로 바꾸는 일은 단순 구축 사업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조업에서 그 출발점은 새 설비가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돌아가는 오래된 기계다.
제조업의 디지털전환은 감가상각이 끝난 기계에서부터
일본, 독일, 한국의 제조 현장을 보더라도 오래된 설비와 데이터 미취득 설비의 비중은 작지 않다. 국내 제조업에서도 15년 이상 된 설비가 40% 수준으로 제시되고, 자동차·일반기계·조선기자재 같은 뿌리 업종에서 노후화 문제는 더 뚜렷하다.
이 숫자는 단순한 설비 노후화만 말하지 않는다. 디지털전환은 주로 새 설비를 향하지만, 제조업의 돈은 여전히 오래된 설비 위에서 움직인다. 결국 질문은 “새 공장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돌아가는 설비를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 질문을 놓치면 스마트공장은 투자 여력이 있는 일부 기업의 언어로만 남는다. 그러나 제대로 붙잡으면, 이미 설치된 설비 전체가 새로운 디지털전환 대상이 된다.
리트로핏: 노후 자산의 경제성을 다시 계산하는 전략
리트로핏(Retrofit)은 오래된 기계나 시스템에 부품, 센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등을 추가해 성능과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수명 연장이나 부품 교체의 의미가 강했다면, 지금은 데이터 취득과 상태 모니터링, 예지보전, 품질 향상, 다운타임 감소로 이어지는 디지털전환의 현실적 입구가 되고 있다.
선진 제조업에서 리트로핏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 설비를 계속 사는 것만이 선진화가 아니다. 오래된 설비를 현재의 품질, 에너지, 데이터 기준에 맞게 다시 끌어올리는 능력도 제조 경쟁력이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에게는 더 절실하다. 투자 여력은 제한적인데 품질 요구, 납기 요구, 탄소 규제는 높아진다.
우리 역시 선진 제조국에 들어선 이상, 오래된 설비를 경쟁력의 기반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국내 제조업에서도 리트로핏 대상 설비가 39% 수준으로 제시된다. 시장조사 전문기관 자료에 따르면 이 시장은 2024년 476억 달러, 2031년 862억 달러(CAGR 8.9%)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센서, 데이터, 상태 모니터링, 예지보전이 결합되면 리트로핏은 단순 수리 시장이 아니라 디지털전환의 진입 시장으로 바뀐다.
VDI(독일 엔지니어링 협회) 사례에서는 CNC 연삭기의 냉각윤활장치, 주축 모터 등에 에너지 센서와 상태 모니터링, 공정 최적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CO₂ 배출 17%, 에너지 소비 18%, 냉각윤활제 사용량 16%를 줄였다고 제시된다. 국내에서도 설치 20년 이상 된 유압식 사출성형기를 하이브리드 전동형으로 개조해 연간 에너지 48%, 전기요금 3000만원을 절감한 사례가 있다. 투자 비용도 전기요금 절감액만으로 2년 만에 회수 가능한 구조다. 낡은 설비를 오래 쓰는 일은 후진적인 선택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선진적인 제조 전략이 된다. 필자가 디지털리트로핏 사업에 대한 개념을 수립하고 추진한 것도 이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디지털리트로핏: 새 기계 중심에서 유지보수와 지능화 중심의 전략으로
사출성형기 제조업을 인수할 당시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센서 회사가 왜 기계 사업에 들어가느냐”는 질문도 있었지만, 센서에게 기계는 언제나 '갑'이었다. 센서는 기계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제어 구조와 충돌하지 않아야 하며, 작업자의 운전 방식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센서라도 적용되지 못한다. 당시 구상은 사출성형기 안에 공정 관리, 생산 관리, 고장 진단, 품질 데이터, 정비 알림 기능을 통합해 기계를 스마트머신으로 고도화하고, 그 위에서 센서 플랫폼과 사출성형기 사업을 함께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2021년 이후 공급망 불안과 원자재 가격 폭등이 이어졌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제조원가 부담을 키웠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신규 제조 중심에서 기존 설비의 유지보수와 지능화 중심으로 옮겨갔다.
기계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새 기계를 사지 못하는 공장은 많았지만 낡은 기계를 멈출 수 없는 공장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20년 이상 사용한 폐기 직전 사출성형기 개조 사례에서는 2년 이내 원가 회수가 제시됐고, 해외 사출성형기 리트로핏 모델에서는 오일 관리 장치 개조만으로 장애를 최대 55% 줄인 사례도 있었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새 기계의 판매 가격만 보던 시야가, 오래된 기계의 남은 수명과 숨어 있는 비용을 다시 계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 방향이 '디지털리트로핏'이고 핵심은 기계 단위 센서 플랫폼 구축이었다. 자체 개발한 '사출기 통합관리 장치'는 컨트롤러와 센서 데이터를 취득해 설비·공정·생산 정보를 HMI와 서버로 전송하는 구조였다. 현장에서는 생산 수량, 달성률, SPC, 고장 진단 정보가 보였고, 관리자는 설비 상태와 생산 흐름을 함께 확인했다.
해외 공장 적용 사례에서는 설비 제조사가 제공하지 않던 생산·품질·유지보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취득하고, 설비에 붙인 HMI와 국내 본사 원격 분석 체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디지털리트로핏 적용 후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설비 상태가 보였고,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도 있었다. 현장은 기계 상태를 보고, 본사는 원격지 설비 상태를 같은 기준으로 분석하며, 품질 담당자는 데이터를 같이 보면서 품질 개선을 준비할 수 있다. 정보 비대칭 해소의 길이 열린 것이다.
수리의 순간에 감각을 심고, 경험을 데이터로 만드는 첫 단계
수리는 대개 고장 난 부품을 바꾸고, 제어기를 교체하고, 배선을 손봐 기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일로 이해된다. 그것만으로도 수명과 성능은 개선된다. 그러나 기계를 열고 배선을 만지고 제어 구조를 들여다보는 순간은 더 큰 기회가 된다. 그때 센서를 넣고, 신호를 꺼내고, 모니터를 붙이고, 데이터를 남기면 수리는 복구가 아니라 기계에 감각과 신경을 심는 일이 된다. 신경이 센서 신호를 꺼내 다음 판단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이라면, 감각은 숙련자가 귀와 손끝으로 읽던 상태를 데이터로 남기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산업계의 오래된 고민인 암묵지의 형식지화가 연결된다. 제조 현장에는 문서로 남지 않은 지식이 많다. 숙련자는 소리, 진동, 온도, 냄새, 미세한 움직임으로 설비 상태를 읽는다. 어떤 작업자는 계기판보다 기계 소리를, 어떤 정비자는 데이터보다 손끝의 진동을 먼저 확인한다. 그러나 그 감각이 사람의 몸 안에만 머물면 조직의 지식이 되기 어렵다. 숙련자가 떠나면 설비를 이해하던 감각도 사라진다. 오래된 설비의 위험은 기계의 나이보다, 그 감각이 데이터로 남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작은 신호 하나를 남기지 못하는 현장은 같은 문제를 계속 경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리트로핏은 이 감각을 센서 신호, 운전 데이터, 품질 결과와 연결해 설비가 남기는 고유 신호로 읽기 위한 첫 단계다.
디지털리트로핏의 본질: 느끼는 기계, 다시 계산되는 자산
감가상각이 끝난 기계는 장부 위에서는 오래된 자산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생산하고, 전기를 쓰고, 불량을 만들거나 줄이며, 정비 비용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설비 상태가 보이면 비용도 보이고, 비용이 보이면 개선의 우선순위도 보인다.
제조업에서 가장 비싼 것은 낡은 기계가 아니다. 그 기계의 어디서 돈이 새는지 모르는 상태가 더 비싸다. 새 설비 투자가 미래를 사는 방식이라면, 디지털리트로핏은 이미 가진 설비에서 아직 회수하지 못한 미래를 꺼내는 방식이다.
낡은 기계를 새것처럼 꾸민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된 설비가 지금도 만들어내는 비용, 품질, 에너지, 정비의 신호를 다시 읽자는 이야기다. 낡은 기계는 버려진 과거가 아니라 아직 데이터가 되지 못한 미래일 뿐이다. 다만 기계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기계가 남긴 그 감각을 어떻게 품질의 언어로 바꿀 것인가.
오재근 | 코아칩스 대표이사
국내 최초 SAW 기반 무전원·무선 센서 개발자로, 센서·에너지 하베스팅·산업용 무선 계측 분야를 25년 이상 연구해왔다. '표면탄성파(SAW)를 이용한 에너지 포집형 무전원·무선 센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SAW 무전원·무선 온도 센서 및 극한 환경용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등을 개발·제품화했다. 기아자동차 연구원, 호서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코아칩스를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무전원·무선 센서,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및 IIoT 센서를 기반으로 디지털 리트로핏, 온디바이스 AI를 연결한 제조 DX의 현실적 적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Copyright © 전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