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먹빛으로 달을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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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수묵 류재춘 작가 인터뷰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류재춘 수묵화 작가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먹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벽마다 보름달이 걸린 수묵화가 겹겹이 자리잡고 있다. 금색 달, 보랏빛 달,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달, 먹빛 파도 위에 낮게 걸린 달. 크기도 색도 감도 각각이지만 모두 가득 찬 느낌이다. 빈 달이 하나도 없다.
"여기 걸어둔 게 500점이고 말아서 보관 중인 작품까지 1000점 정도가 됩니다." 류 작가는 별일 아니라는 투다. 그래도 1000이란 숫자 앞에선 잠시 생각이 많아진다. 단순히 다작의 기록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한 방향으로 수십 년 집요하게 걸어온 작가의 흔적일 터다.
K-수묵화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류재춘 작가는 지난 14일부터 서울 강남 아톨로지(Artology)에서 《달과 수묵(Moon & Waves)》 초대전을 열고 있다. 6월 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 달과 파도를 주제로 한 수묵화 20여 점과 미디어아트 작품을 함께 선보였다. 아톨로지는 도형태 현대갤러리 부회장 VIP 전용공간이다. 전시 규모와 장소 모두 그가 지금 K-수묵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달이 먼저 찾아왔다
류 작가와 달의 인연은 의도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그는 화업에 입문했던 초기 20년간 달을 한 번도 그리지 않았다. 그의 화폭에 달이 처음 등장한 건 2015년이었다. "2주 동안 똑같은 꿈을 꿨어요. 보라색 하늘에 달이 떠있는 꿈이었죠. 저도 모르게 그걸 그렸어요. 첫 달 그림을 완성하고 나니 다시는 같은 꿈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월하(月河)〉라는 작품이다.
그 뒤 달은 류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강렬하고 지속적인 언어로 변했다. 흥미로운 건 그가 항상 '만월'만 그린다는 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왜 항상 보름달이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초승달이나 그믐달, 반달을 그리지 않았던 것.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달이 있어요. 가슴 안에 소원을 빌고 에너지를 모으는 달이죠. 저는 제 달을 그때 세상에 비로소 꺼내 놓은 거예요."
류 작가가 그리는 달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테두리에 붉은 띠가 둘러져 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뜨거운 무엇이다. 어떤 이는 "해를 품은 달"이라고 한다. 그 붉은 기운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을 처음 꺼낼 때 제 안에서 뜨거운 에너지가 나가는 게 느껴졌어요. 그게 그대로 화면에 담긴 것 같아요."
달은 그에겐 정신적 에너지의 결정체다. "달은 태양처럼 뜨겁지 않죠. 따뜻하면서도 마주하면 안정을 주고 위로해주는 존재예요. 수묵은 어머니의 양수 같아요. 태아가 양수 안에서 태어나듯, 먹이 한지 위에 스며드는 게 꼭 닮았죠." 이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그의 작품들이 그대로 드러낸다.
파주 작업실에서 완성된 수묵화에 마지막 터치를 하고 있는 류재춘 작가
카니발 트렁크 위에서 그린 산수
류 작가는 뭔가에 꽂히면 돌아가는 법이 없는 성정이다. 성균관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동국대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거기에 전통 수묵화를 30년 이상 수련해 기반이 탄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진짜 작업은 애초에 강의실과 작업실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카니발 차량 뒷자리에 매트리스 깔고 종이박스를 실은 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풍수 좋은 사찰을 둘러싼 나무들에 에너지가 넘치죠. 그래서 금강산도 가고 중국의 황산도 돌며 수묵화를 그렸어요. 좋아서 한 일이니 몸이 고된 줄 몰랐죠." 젊은 시절 한밤중에 산을 오르고, 제주 해안도로에서 파도를 바라보며 탄생시킨 게 〈바위꽃〉 연작이다. 그 작품들은 지금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류 작가의 작품에서 먹이 한지 위에 피어나는 형상이나 번짐·스밈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패턴은 붓질이라기 보다 물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듯 보인다. 박영택 평론가가 "전통적인 붓질을 유지하면서도 구상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필치와 태점이 공존하는 독자적인 회화적 공간"이라고 말한 게 바로 그 지점이다.
이제 류 작가와 달은 떼어 내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안현정 미술비평가가 "풍요의 달이 류재춘이 되었다"고 한 건 달이 그의 시그니처를 넘어 하나의 세계관이란 점을 잘 포착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달, 산, 파도, 폭포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기운과 에너지를 담는 그릇 자체다. 그래서류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달이 파도를 만드는 까닭
류 작가가 아톨로지에서 하는 전시의 타이틀 《달과 수묵》에는 영어로 'Moon & Waves(달과 파도)'가 함께 쓰여 있다. 달이 조수를 당기고 파도를 만들듯 화면 위에서 달빛과 먹의 물결이 서로 스며드는 장면을 담아낸다는 의도가 담겼다. 정(靜)과 동(動), 빛과 물질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작품을 보는 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닌내면의 파장을 느끼게 된다. "달과 수묵, 우리말로는 '빛가람'이죠. 빛이 흐른다는 뜻이니 달빛이 수묵 위에 흘러서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는 전시라고 해야겠죠."
아톨로지 전시에는 달빛에 잠긴 산수화, 거대한 파도와 폭포를 담은 대형 신작들이 포함됐다. 먹의 번짐과 스밈, 농담의 극단적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나란히 걸렸다. 아톨로지 1층의 레스토랑 벽면에는 수묵화 미디어아트가 채워졌다. 정담을 나누면서 달빛과 먹물이 화면 위를 흐르는 작품을 보면 자연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카타르의 사막에 뜬 달
류재춘의 달은 국경을 넘어 중동의 카타르까지 진출했다. 지난해 10월 카타르 도하 카타라 문화마을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 단독 개인전 《한국의 달》을 연 것. "한국의 달이 카타르의 달을 만나 세계의 달이 됐다"고 한 그의 말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잘 압축한다. 카타르의 사막에서 보는 달은 보라색과 금색 빛이다. 류 작가의 달 그림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현지 관객들이 그의 〈월하〉 시리즈에 열광한 건 단순한 이국 취향 때문이 아니었다. 달이라는 보편적 이미지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감성이 공명을 이룬 것이다.
류 작가의 수묵화를 카타르 왕실에 적극적으로 알린 사람은 카타르 왕족인 모하메드 알 하이키 주한 카타르 대사이다. 그의 천거에 카타라 문화재단 대표가 직접 류 작가의 전시를 추진해 카타르 방송과 언론에 수차례 소개됐다. 이제 류 작가의 작품은 카타르 국립미술관에 소장돼 중동 한복판에서 K-수묵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K-수묵을 우주로 보내겠다는 꿈
류 작가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술과의 결합이다. 미디어아트, NFT, LED 특허, 그리고 로봇까지 그의 관심사는 끝이 없다. 류 작가는 수묵화를 국내에선 처음 NFT로 발행했고, 한지의 물성이 빛에 따라 변화하는 원리로 LED 특허를 출원했다. TV 패널과 같은 원리라는 걸 업계 관계자에게 들은 뒤 전광판과 미디어 파사드로 확장시키는 발상을 한 것이다.
"지금은 로봇과 함께 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로봇이 수묵화를 그리고, 수묵화가 그려진 옷을 입고 춤을 추도록 할 거예요. 전통과 미래가 콜라보가 되는 장면이죠."
현재 그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 대우교수로 LED·미디어아트·AI와 수묵의 접점을 탐색하는 융합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이사도 겸하는 그는 최근에는 재정경제부 AI융합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AI와 문화를 연결해 발전시키는 아이디어에도 골몰하고 있다. 창작과 행정·교육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그는 K-수묵의 외연을 넓히는 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류 작가가 K-수묵의 미래에 대해 가진 생각은 분명하다. "수묵이 과거의 양식에 갇히면 안돼요. 전통의 정신은 그대로 가져가되 재료와 매체는 완전히 열어야 해요. 캔버스가 아니어도 되고, 홀로그램 공간이어도 되고, 우주에 쏘아 올려도 되죠. 머스크의 우주선을 타고 K-수묵이 우주로 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는 여러 경로로 이런 생각을 더 벼리고 있다. 전통 형식을 고집하면 '과거의 재현'에 머물고, 재료만 현대화하면 정체성이 희석되는 딜레마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살아있는 작업을 해내는 게 K-수묵이 직면한 과제라는 생각에서다. "수묵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확신은 그가 30년 넘게 해온 화업의 결론이다.
먹빛이 흐르면 달이 떠오른다
류 작가 작업실에 걸린 달들은 금색, 보라색, 붉은색, 흰색, 저마다 다르지만 하나 같이 이지러지지 않고 가득차 있다. 그의 달은 결핍이 아닌 충만의 이미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빛나는. 먹물이 한지에 스며들듯 조용히 보는 이의 안쪽으로 번져 들어오는 달이다. 그의 작업을 동양 수묵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오늘의 감각 속에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이번 아톨로지 전시를 계기로 류 작가는 독특한 시도를 해볼까 고민 중이다. 삼베로 짠 최고급 전통 섬유인 안동포로 한복을 만들어 입고 그 위에 한지를 배접해 수묵을 얹으려는 것. 지금까지의 수묵이 종이 위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옷감 위에 달을 띄워 K-수묵과 옛 섬유공예를 접목하는 셈이다. 류 작가식 ‘경계 허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류 작가는 200여 회에 달하는 단체·기획전 외에 21회의 개인전과 한국을 넘어 카타르, 중국, 러시아 등 국경과 매체를 가로지르는 행보를 거침없이 이어가고 있다. 그가 붓을 드는 모든 순간은 수묵을 살아있는 언어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달을 세상으로 꺼내려는 시도다. 아톨로지에서 먹빛 화면 위에 그가 띄운 달을 보며 잠시 자신 안에 떠오르는 달을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될 듯하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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