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8000 시대의 ‘착시와 역설’… 신기루 뒤에 숨은 네 가지 경고음[조원경의 경제·산업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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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프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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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를 둘러싼 패권 경쟁의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심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자본시장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경이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자본시장의 꿈의 고지로 여겨졌던 코스피 8000선이 마침내 돌파된 것이다. 이 극적인 드라마의 주연은 단연 인공지능(AI) 혁명의 거대한 파도 위에 올라탄 ‘삼전닉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글로벌 반도체 투톱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차세대 AI 반도체 메가 사이클의 중심에서 대한민국 기업들이 보여준 기술적 리더십과 압도적인 이익 창출력은 글로벌 헤지펀드와 기관 투자자들의 시선을 서울로 집중시켰으며, 증시를 글로벌 무대의 중심축으로 당당히 격상시켰다.
숫자가 주는 최면에 취해 현실을 오판할 때, 경제는 가장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한다. 코스피 8000이라는 대기록이 달성되는 축제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환호성을 잠시 멈추고 이 화려한 지수가 가리고 있는 냉혹한 현실의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추적해야 한다. 반도체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기둥에만 기대어 선 한국 경제의 외줄 타기는 지금 네 가지 뚜렷한 역설의 경고음을 울리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다.
1. ‘천장 뚫린 증시’와 ‘요지부동 고환율’의 기묘한 불협화음
주식시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대호황기에 외환시장이 보여주는 반응은 지극히 이례적이며 기괴하기까지 하다. 거시경제학의 전통적인 원칙과 교과서적 상식에 따르면, 국내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질주할 때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막대한 외국인 투자 자금이 원화 환전을 거쳐 국내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국내 자본시장으로 유입되는 달러화의 총량이 늘어나면 외환시장에서 원화의 가치는 강세를 보이고, 이에 따라 원·달러 환율은 하향 안정화되는 것이 시장의 기초적인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환시장은 증시의 기록적인 폭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러당 1500원 선을 안팎을 위태롭게 넘나들며 완강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증시는 매일 축제를 벌이는데, 환율은 과거 금융위기나 거시경제 충격 시기에나 볼 법한 수준에서 굳건히 버티는 기묘한 동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정상적인 패러독스의 원인을 추적해 보면, 주식시장의 표면적인 지수 상승을 이끄는 내부 동력과 실제 글로벌 자금의 흐름 사이의 심각한 괴리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코스피 8000이라는 대기록이 달성되는 영광스러운 와중에도, 역설적으로 자본시장의 진짜 큰손인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매도 우위를 점하며 이른바 ‘셀 코리아(Sell Korea)’를 지속하고 있다. 결국 외환시장의 고환율 기조는 외국인들의 눈에 지금의 코스피 8000이 한국 체질 개선의 성적표가 아니라, 특정 기술 섹터에 과도하게 함몰된 ‘과열된 신기루’로 읽히고 있다는 결정적 방증이다.
2. ‘삼전닉스’만 독주하는 착시, 쏟아지는 52주 최저가 속 ‘풍요 속의 빈곤’
코스피 8000이라는 숫자가 발산하는 화려한 광채 이면을 한꺼풀 더 들여다보면, 대다수 중소기업과 개인 투자자들, 그리고 비(非)반도체 기업들이 느끼는 지독한 소외감과 얼어붙은 냉기가 자리 잡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종합주가지수 폭발은 한국 경제 전반의 고른 성장을 반영하는 지표가 아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두 거대 기업이 한국 증시체계의 시가총액 비중을 압도적으로 장악한 채 지수를 억지로 견인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평균의 함정’이자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 지수라는 거시적 숫자가 주는 착시를 걷어내고 시장의 진짜 민낯을 확인하기 위해 개별 종목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대단히 기이하고도 서글픈 균열과 모순이 목격된다.
종합주가지수는 연일 역사적 고점을 경신하며 질주하고 있지만, 정작 시장 전체에서 ‘52주 최저가’를 기록하며 바닥을 알 수 없이 추락하는 종목의 수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수는 사상 최고치인데 내 주식은 연일 폭락하는 이 기형적인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은 한국 산업 생태계가 심각하게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위기의 실체가 더욱 명확해진다. 첫째, 과거 한국 수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화학과 철강 산업은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와 글로벌 경기 둔화라는 이중고의 직격탄을 맞아 고사 직전에 몰려 있다. 둘째, 유통을 비롯한 전통적인 내수 산업군은 고물가와 고금리의 장기화로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고갈되면서 지독한 소비 침체의 수렁에 빠져 있다. 셋째,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받았던 바이오 섹터 역시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신약 개발을 위한 자금 조달의 활로가 막혔고, 글로벌 임상 실패 소식 등이 겹치며 몇몇 초대형 주를 제외한 중소형 바이오벤처들을 중심으로 주가가 바닥을 알 수 없이 추락하여 연일 최저가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3. ‘8000피’가 쏘아 올린 차익실현, 결국 수도권 부동산 쏠림으로 이어지는 자산 왜곡
지금의 증시 호황이 한국 사회와 경제 구조 전체에 던지는 세 번째이자 가장 치명적인 역설은, 주식시장의 폭발적 상승을 통해 창출된 막대한 자본과 과실이 우리 경제의 실물 모세혈관인 ‘내수 소비’나 경제의 미래를 바꿀 ‘신산업 기술 투자’로 전혀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그 엄청난 유동성은 또다시 서울 강남권을 비롯한 수도권 핵심지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자산 블랙홀 속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경제학적 원리에 따르면, 증시가 급등하여 가계 금융자산이 증가하면 주주들의 부가 늘어나 자연스럽게 소비 지출을 진작시키는 이른바 ‘자산효과’가 발생하고, 이것이 내수 경기를 살리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상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은행의 심층 분석 보고서가 지적하듯, 대한민국의 가계가 보여주는 주가 상승에 따른 소비 진작 효과는 주요 선진국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투자자들은 주식 투자를 통해 거둔 결실을 현실의 소비나 생산적인 재투자에 쓰지 않는다. 대신 주식을 매각해 확보한 현금을 부동산 자산을 매입하기 위한 대기 자금이나 종잣돈으로 철저하게 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서울 강남 3구와 이른바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등 수도권 상급지 아파트 매매 시장의 자금조달계획서를 정밀 분석해 보면, 주식 및 채권의 매각 대금 유입 비중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확보된다. 시장에서는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팔아 강남의 똘똘한 한 채를 샀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성공 방정식으로 통용된다. 이러한 기형적인 머니무브(자금 이동) 현상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심각한 부작용과 사회적 병폐를 낳는다.
4. ‘반도체發 독식’이 부른 착시, 성과급 갈등과 물가 압력(칩플레이션)의 부메랑
네 번째로 마주해야 할 역설은 특정 대기업 실적의 호황이 기업 내부 및 사회적 분배 갈등을 격렬하게 자극하고, 도리어 거시경제 전반의 고물가 압력을 가중시키는 ‘부의 역습’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투톱이 기록한 역대급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는 필연적으로 해당 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천문학적인 액수의 성과급 지급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에 따른 정당한 보상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문제는 이 화려한 보상 체계가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과제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심화시키고 계층 간 간극을 한층 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기업 중심의 ‘이익 독식과 상생 결여’ 프레임이 강해질수록, 노동계 내부에서는 이를 제도적으로 교정하고 원청 기업의 책임을 강제하겠다는 명분 하에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입법 투쟁 요구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결국 성과급 격차로 깊어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노동 양극화가 노사 갈등과 정치적 대립의 뇌선을 자극하여 사회 전반의 불확실성과 비용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가해지는 압박도 만만치 않다. 글로벌 AI 반도체 수요 폭증에 따른 핵심 칩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은 단순히 기업의 이익 증가에 그치지 않고, IT 기기, 자동차, 가전 등 전방위적인 산업 제품의 생산 단가를 밀어 올리며 글로벌 공급망 전반의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이른바 ‘칩플레이션(Chipflation)’ 우려를 현실화하고 있다.
코스피 8000이라는 역사적인 전인미답의 고지 돌파는 분명 대한민국 산업계와 자본시장이 가진 무서운 저력과 잠재력을 세계 무대에 증명해 낸 위대한 훈장이다. 그 누구도 이 이정표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환호성 뒤편에서 동시에 목격하고 있는 외환시장과의 지독한 불협화음, 비반도체 기간산업들의 도미노 주가 추락, 금융자산의 수도권 부동산 시장으로의 기형적 쏠림, 그리고 임금 격차로 인해 촉발되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심화와 노사 갈등은 이 위대한 훈장이 얼마나 위태롭고 취약한 모래성 위에 놓여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다.
냉정하게 진단하자면, 지금의 대호황은 대한민국 거시경제 전반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이 탄탄하게 다져진 성장의 결실이 아니다. 글로벌 AI 산업 혁명이라는 미증유의 특수한 시공간적 환경 속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두 거인이 일궈낸 외로운 독주(獨走)가 만들어낸 지수적 착시에 가깝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가 지수의 숫자가 주는 최면에 취해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라, 다가올 난기류에 대비하여 차갑고 냉철한 ‘거시적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할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학계와 경제계는 반도체 투톱에서 촉발된 강력한 성장 동력과 자본의 과실이 대기업의 높은 울타리를 넘어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 전반의 실물 모세혈관으로 골고루 흘러들 수 있도록, 과거 작동이 멈춰버린 ‘낙수효과의 선순환 가치사슬’을 완전히 새롭게 재설계해야만 한다.
시장의 관심에서 소외된 화학, 철강, 조선 등 전통 수출 제조업들이 스스로 체질을 바꾸고 디지털 및 친환경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대전환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대기업의 초과 이익이 중소 협력업체들과의 공정하고 실질적인 기술 협력 및 이익 공유 매커니즘을 통해 상생의 혈류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제도적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더불어 자산시장 내부에서 부동산 투기 자금으로 변질되는 풍부한 유동성을 대한민국 미래를 짊어질 스타트업 생태계와 첨단 기술 벤처 가치사슬로 유인할 수 있는 정교하고 매력적인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코스피 8000 돌파라는 화려한 축제 뒤에서 들려오는 구조적 역설의 경고음들을 엄중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대기업의 독보적인 성과가 대한민국 경제 전체의 체력 강화,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 그리고 건강한 내수 활성화로 퍼져나가는 ‘상생과 공존의 가치사슬’을 완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착시와 거품이 없는, 진짜 ‘코리아 프리미엄’의 신기원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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