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임금 동결'이었던 일본, 갑자기 6% 오른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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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인재 이탈 공포가 바꾼 임금투쟁(춘투)의 본질, 연공서열 문화가 흔들린다
33년 동안 임금이 멈춘 나라. 지금 일본의 춘투는 반성문이자 생존 전략이다. 도요타는 왜 6년째 노조 요구를 100% 들어주는가. <기자말>
[김영근 기자]
▲ 일본의 임금투쟁(춘투) 이미지
ⓒ 김영근 제공(by Perplexity AI)
봄이 되면 일본 열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대기업 회의실에서는 노사 대표들이 마주 앉아 숫자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고, 언론은 올해 임금인상률이 얼마나 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국에서 보면 낯선 풍경일 수 있다. 일본은 이미 안정된 선진국인데, 왜 해마다 봄마다 임금 협상을 반복하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지만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조금 다르다. 왜 일본은 30년 넘게 임금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이제 와서 다시 임금 인상에 매달리기 시작했는가.
30년의 침묵, 한 세대가 증발한 임금표
일본의 춘투 임금인상률은 2023년 3.58%로 반등했고, 2024년에는 5.10%에 이르러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5%대를 돌파했다. 33년이라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한 세대 동안 일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사실상 제자리였다. 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내부유보로 쌓였지 노동자의 지갑으로 오지 않았다.
2025년 춘투 최종 집계에서는 전체 임금인상률이 5.25%, 300인 미만 중소 조합은 4.65%를 기록했다. 2026년에도 흐름은 이어졌다. 3월 23일 기준 1차 집계에서 평균 인상률은 5.26%로 전년보다 0.20%포인트 낮았지만, 3년 연속 5%대를 유지했다. 특히 300인 미만 중소 조합도 5.05%로 처음 5%를 넘어섰다.
숫자만 보면 일본이 마침내 임금 정상화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여전히 더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임금 인상이 시작됐다고 해서 구조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액 회답의 그늘: 대기업의 봄, 중소기업의 겨울
3월 집중 회답일에 도요타 자동차는 6년 연속, 히타치 제작소는 5년 연속 만액 회답(요구액 전부 수용)을 기록했다. NEC, 미쓰비시전기, 후지쓰, 파나소닉홀딩스 같은 대기업도 잇따라 고수준 인상에 나섰다. 도요타의 인사 책임자는 "생산성 향상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일관되게 논의했다"고 말했다. 임금 인상이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전략적 계산이라는 뜻이다.
반면 일본 전체 고용의 약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현실은 다르다. 렌고는 격차 해소를 위해 "전체 5% 이상, 중소 6% 이상"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실제 중소 조합의 인상률은 5.05%에 그쳤다. 히타치와 NEC, 후지쓰 같은 대기업이 6% 안팎의 인상을 단행하는 동안, 상당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그만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같은 일본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임금 현실이 공존하는 셈이다.
임금 협상장에 AI가 난입한 이유
여기서 질문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춘투와 디지털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 그리고 AI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얼핏 보면 직접 연결되지 않는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일본 기업들에는 이 둘이 사실상 하나의 문제다.
일본 정보처리추진기구(IPA)의 'DX동향 2025'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85.1%가 "디지털 인재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미국이나 독일과 비교할 때 현저히 높은 수치다. 경제산업성은 2030년까지 일본에서 최대 79만 명의 IT 인재가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후생노동성 통계에서도 2025년 11월 기준 정보처리·통신기술자의 유효구인배율은 1.43배로, 전체 직종 평균 1.12배를 크게 웃돈다. AI·디지털 인재를 뽑으려 해도 뽑을 사람이 없는 구조다.
이 공백을 가장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구글, 애플, 메타, 아마존 같은 글로벌 테크기업들이다.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도 세계 표준에 가까운 연봉을 제시하며 우수 엔지니어를 빨아들이고 있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디지털 혁신을 이끌 핵심 인재를 빼앗기고, 그 인재를 잃으면 AI 시대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다. 임금 인상이 더는 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조건이 된 이유다.
2026년 IT·통신 대기업의 춘투에서 NEC, NTT, 히타치, 후지쓰 노조는 모두 전년도 타결액을 웃도는 고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SIE(소니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는 2026년 4월 1일부터 대졸 신입사원 초임을 종전 35만8000엔에서 42만5000엔(연봉 510만 엔)으로, 사상 최대 폭인 6만7000엔 올렸다. 회사는 이를 "글로벌 조직에서의 도전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본질은 분명하다. 글로벌 테크기업과의 인재 쟁탈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임금 체계 자체를 뜯어고치는 기업도 등장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은 2026년 1월, 25년 만에 처음으로 새 인사제도 '스테이지(Stage)'를 도입해 연공서열을 사실상 폐지하고, 나이가 아닌 역할과 성과에 따라 처우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오래 근무하면 자동으로 더 받는 구조로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붙잡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일본식 고용 관행의 상징이던 연공서열이 AI 시대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올려도 무너진다: 방어적 임금인상의 함정
문제는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들도 대기업을 따라 임금을 올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다이이치세이메이경제연구소는 "2026년에도 2025년과 같은 수준의 임금인상을 실현하려면 가격 전가(원가 상승분을 판매가격에 반영하는 것)의 추진과 디지털 기술 활용을 통한 노동생산성 개선이 불가결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상공회의소의 2025년 9월 조사에 따르면, 실적이 개선되지 않았는데도 인재 확보를 위해 이른바 '방어적 임금인상'을 실시한 중소기업 비율은 65.0%에 달했다. 팔리는 물건이 늘어서 임금을 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떠나지 않게 하려고 버티기 위해 임금을 올렸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가격 인상이나 투자 억제로 이어지고, 중소기업의 디지털 투자 여력을 더욱 약화시킨다. 딜레마는 분명하다. 디지털 기술로 생산성을 높여야 임금을 지속적으로 올릴 수 있다. 그런데 당장 임금을 올려야 하는 압박 때문에 디지털에 투자할 여유가 없다. 사람에게 돈을 써야 하니 기계와 소프트웨어에 투입할 자금이 줄어든다. 생산성 향상이 먼저여야 하지만, 그 생산성을 끌어올릴 투자 자체가 막히는 악순환이다.
한국도 같은 덫 위에 서 있는가
이 딜레마는 한국도 비껴가지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첨단 인재를 둘러싼 쟁탈전, 생산성 없는 임금 압박의 부담은 한국 역시 공유하는 현실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은 고액 성과급을 지급하지만, 다수 제조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은 제자리를 맴돈다. 구조만 놓고 보면 일본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다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일본의 춘투에는 최소한 제도적 무대가 있다. 노사가 해마다 봄 마주 앉아 임금과 노동조건을 협의하고, 요구와 타결 결과를 공개적으로 축적한다. 렌고가 "사람에 대한 투자를 기점으로 경제의 선순환을 강력하게 돌린다"고 선언할 때, 그 선언이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질문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반복하는 틀은 존재한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여전히 파업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 사이에서 임금과 노동생산성, 디지털 투자, 인재 확보를 연결하는 전략적 대화는 충분히 제도화되지 못했다.
임금은 비용이 아니다: AI 시대의 새로운 방정식
일본이 매년 춘투를 반복하는 이유는 단순히 물가가 올라서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사람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30년간의 정체를 통해 뼈아프게 배웠기 때문이다. AI 엔지니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디지털 전략가는 더 좋은 조건이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임금 경쟁력을 잃은 기업은 결국 인재를 잃고, 인재를 잃은 기업은 디지털 경쟁에서도 뒤처진다.
이 흐름 속에서 연공서열 모델은 빠르게 힘을 잃고 있다. 성과와 역할에 따라 보상을 차등화하는 방향으로 임금 체계가 움직이면서, 과거처럼 일률적 임금인상만을 요구하는 방식의 의미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 잘하는 사람에게 더 주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유능한 인재는 남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본의 임금인상률 숫자 그 자체가 아니다. "임금을 어떻게 디지털 투자, 생산성 향상, 인재 확보와 연계할 것인가"라는 전략적 질문을 노사가 함께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기 비용 절감을 위해 일손을 AI로 대체하고, 신규 채용을 줄이는 근시안적 발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AI는 인재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재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도구여야 한다. 사람에 대한 투자를 미루면 미룰수록, 그 공백은 경쟁력의 빈자리로 되돌아온다."
매년 봄, 도요타 본사 앞에서 노사가 마주 앉는 장면은 더 이상 단순한 임금 협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함께 헤쳐나가겠다는 노사 간의 연례 신뢰 확인이자, AI 시대 기업 생존을 위한 공동 전략회의다. 한국의 노사도 봄마다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올봄 춘투(春鬪)의 진짜 화두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 글쓴이 김영근은 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한일경상논집』,『3·11 동일본대지진을 새로이 검증하다』(단역),『일본 원자력 정책의 실패』(단역),『재해 리질리언스: 사전부흥으로 안전학을 과학하자』(공저),『일본의 재해학과 지방부흥』(공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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