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더 쓸테니 국민은 더 일하라”… ‘노동자 천국’ 독일, 병가·해고·연금 대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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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메르츠 연정, 34개 분야 구조개혁 타결 노동·연금 개혁으로 성장 엔진 재점화 근로 관행 대대적 손질 “더 일하고 늦게 은퇴하라”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이 병가·해고·연금 제도를 한꺼번에 손보는 대수술에 나섰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독일 연립정부는 2일(현지시각) 연금·노동·세제·산업·주택·행정 등 34개 분야를 아우르는 구조개혁안 ‘재도약·고용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앞으로 독일 근로자는 감기로 결근하려면 아픈 첫날부터 병원을 찾아 진단서를 내야 한다. 연봉 18만유로(약 3억2000만원)가 넘는 고소득 근로자는 금전 보상을 전제로 지금보다 쉽게 해고될 수 있다. 은퇴 시점은 기대수명에 맞춰 단계적으로 늦춰진다. 고용 안정과 노동자 보호를 중시해 온 독일이 병가·해고·연금이라는 복지국가의 핵심 제도를 동시에 손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메르츠 총리는 이날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SPD) 라르스 클링바일·베르벨 바스 공동대표, 기독사회당(CSU) 마르쿠스 죄더 대표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독일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겠다”고 말했다. 연정 지도부는 전날 7시간에 걸친 밤샘 협상 끝에 개혁안을 타결했다.
2일 독일 동부 드레스덴에 위치한 인피니언 스마트 파워 팹 개소식 생중계 중 화면에 비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정부는 지난 4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전망 절반인 0.5%로 낮췄다. 내년 전망치도 1.3%에서 0.9%로 내렸다. 독일이 기대 온 수출 제조업 중심 성장 모델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가 끊기고 자동차·기계·화학 시장을 중국에 잠식당하면서 휘청이고 있다. 고령화로 일할 사람도 줄고 있다. 로이터는 “극우 독일대안당(AfD)에 지지율이 밀리는 메르츠 정부는 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해 왔다”며 “9월 작센안할트주 선거에서 AfD가 처음으로 주정부를 차지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고 했다.
이번 개혁안은 지난해 3월 독일 정부가 조성한 5000억유로(약 887조원) 규모 인프라 특별기금 뒤를 이어 발표됐다. 독일은 유로존 내에서도 재정 긴축의 대명사였지만, 최근 재정준칙을 완화하고 철도·전력망·디지털 분야에 국가가 직접 투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그 돈이 실제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노동 공급과 기업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제도 개혁에 나섰다. 국가는 투자와 감세를 확대하되 기업에는 인력 운용의 유연성을, 근로자에게는 더 긴 노동 생애와 엄격한 근무 규율을 요구하는 구조다.
다만 노동시장 유연화만 밀어붙일 경우 커질 반발을 고려해 재분배 정책도 강화했다. 이번 패키지는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CDU·CSU)이 요구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이 주장한 재분배 정책을 한 묶음에 담은 연정의 결과물이다. 메르츠 정부는 병가 규정 강화와 기간제 고용 확대, 고소득자 해고 유연화로 보수 지지자 요구를 맞추고, 중·저소득층 감세와 아동수당 인상, 부유층 증세와 공공주택 확대로 반대 균형을 맞췄다.
국민에게 더 오래 일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가계 세금 부담을 낮추고, 그 재원은 최고소득자가 더 부담하도록 하는 구조다. 독일 정부는 이에 따라 내년 1월부터 중·저소득층 소득세를 연 100억유로(약 17조7000억원) 규모로 깎는다. 메르츠 총리는 “평균적인 맞벌이 자녀 가구가 연 600유로(약 106만원)의 감면 혜택을 볼 것”으로 설명했다. 현재 월 259유로(약 46만원)인 아동수당도 2028년까지 272유로로 올린다. 재원 일부는 연소득 28만유로(약 4억9600만원)를 넘는 고소득자의 최고세율을 45%에서 47%로 올려 마련한다. 가계 감세와 고소득자 증세를 함께 묶어 노동시장 개혁이 ‘기업에는 혜택을 주고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요구한다’는 비판을 막으려는 설계로 풀이된다.
독일 근로자는 그동안 병가 첫 3일은 진단서 없이 쉴 수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는 전화 한 통으로 병가 확인서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완화됐다. 정부는 이번 개혁안에서 이 전화 병가 제도를 폐지하고, 아픈 첫날부터 의사 진단서를 제출해야 병가로 인정받도록 했다. 메르츠 총리는 그동안 “주 4일 근무나 잦은 병가 같은 습관이 독일 경쟁력을 해친다”고 주장해 왔다. 기업이 계약 미연장 사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간제 계약 상한은 현행 24개월보다 두 배 긴 48개월로 늘어난다. 이와 별도로 연금보험료 산정 상한액 기준 1.75배, 현재 기준 연봉 약 18만유로(약 3억2000만원) 이상을 버는 고소득 근로자는 바로 내년부터 ‘적절한 금전 보상’을 조건으로 해고할 수 있게 문턱을 낮췄다.
메르츠 정부는 보험료를 낼 젊은 인구는 줄고 수급자는 늘어나는 만큼, 현 수준 연금을 지키려면 국민이 더 오래 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개혁안은 지난달 연금위원회가 내놓은 권고 33개를 전부 이행하고 연내에 관련 입법을 마친다고 명시했다. 현역 세대가 낸 보험료로 은퇴자 연금을 지급하는 부과방식 골격은 유지한다. 대신 스웨덴식 연기금 방식을 도입해 일부 재원은 주식·채권 같은 자본시장에 투자한다. 현재 65~67세인 은퇴 연령은 기대수명 증가에 맞춰 단계적으로 올리고, 조기연금은 축소한다. 또 프리랜서도 공적연금에 보험료를 내도록 해 재정을 강화하는 방안을 담았다.
마리온 뮐베르거 도이체방크 리서치 연구원은 “독일 정부가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개혁 패키지 중 하나에 합의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독일 최대 노조 IG메탈의 크리스티아네 베너 위원장은 근로자 감세는 환영하면서도 기간제 계약 확대를 “노동자 권리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마르쿠스 블루멘탈-바이어 독일 가정의협회장은 병가 규정 개편을 “완전히 재앙적”이라며 진료 현장에 행정 부담이 몰려 환자 대기시간만 길어질 것이라고 했다.
클레멘스 푸스트 이포경제연구소 소장은 로이터에 “이번 패키지의 최대 약점은 정부 지출을 통제할 조치가 빠졌다는 점”이라며 “지출 증가를 억제하지 못하면 감세는 중기적으로 지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베렌베르크은행은 개혁이 전면 이행될 경우 독일의 추세성장률이 연 0.4%에서 0.7%로 높아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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