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원짜리 시계, 60만원에 ‘맛만 보자’… 고가 브랜드 ‘조각 소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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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오데마 피게 협업 대란 고가품 불황 시기에 콜라보는 성황 고가 브랜드 ‘상징 쪼개 팔기’로 돌파구
스위스 시계 브랜드 스와치와 고가 시계 제조사 오데마피게(Audemars Piguet)가 협업한 제품 ‘로얄팝(Royal Pop)’이 16일(현지시각) 출시되자마자,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홍콩 등 세계 주요 도시 스와치 매장에 이례적인 인파가 몰렸다.
영국 BBC는 맨체스터·리버풀 스와치 매장에 사람이 몰려 이틀 연속 매장이 안전 문제로 폐쇄돼고, 정가 335파운드(약 67만원)짜리 시계가 영국 이베이에서 최대 3000파운드(약 600만원)에 재판매됐다고 전했다. 프랑스 경찰은 파리 한 매장 앞에 모인 300명 규모 인파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다. 미국 뉴욕에서는 60만원짜리 협업 시계 한 점을 사려고 타임스스퀘어 스와치 매장 앞에서 닷새 이상 텐트를 친 사람이 100명을 넘었다. 출시 당일 미국 시계 거래 플랫폼 크로노24에 정가 400달러(약 60만원)짜리 시계가 1430~8472달러(약 215만~1280만원)에 매물로 올라왔다.
15일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위치한 스와치 매장 앞에 오데마피게와 스와치의 협업 제품인 로얄팝 시계 출시를 앞두고 사람들이 밤샘 줄을 서 있는 모습. /연합뉴스
로얄팝은 목걸이나 가방에 달아서 쓰는 포켓워치(회중시계)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손목시계가 아니다. 스와치가 개발한 바이오세라믹 소재를 사용해 일반 금속 손목 시계보다 훨씬 가볍고, 색상도 다양하다. 이 제품 외형은 1875년 창업한 스위스 초고가 시계 제조사 오데마피게가 1972년 선보인 대표 모델 ‘로열오크(Royal Oak)’에서 팔각형 베젤과 노출 나사, 타피스리(tapisserie) 다이얼 패턴을 따왔다. 여기에 스와치가 1980년대 출시한 팝(Pop) 라인 색상을 더해 차별화했다.
오데마피게는 파텍필립, 바쉐론콘스탄틴과 함께 시계업계에서 삼위일체(Holy Trinity)’로 묶이는 독립·가족 소유 초고가 시계 제조사다. 대표작 로열오크 라인은 미국 시장에서 중고 제품이 보통 2만달러(약 3000만원)부터 시작한다. 순금을 일부 사용한 한정판은 14만달러(약 2억1000만원)를 넘는다.
일반 소비자는 가격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진짜 로열오크를 사긴 어렵지만, 400달러에 로열오크 세계관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계 전문 사이트 크로노24 공동창업자 팀 스트라케는 이번 협업을 “10년 만에 나온 최고의 홍보 전략(the PR stunt of the decade)”이라고 평가했다. 로얄팝은 전 세계 일부 매장에서만 팔리며, 하루에 한 사람이 한 매장에서 딱 1점만 살 수 있다. 다만 한정판은 아니다. 스와치는 공식 발표를 통해 “몇 달간 판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 시계 유통업체 유러피언워치 컴퍼니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최고급 시계의 ‘스와치화(Swatchification)’가 게임을 바꿨다”고 했다. 스와치는 앞서 2022년 오메가, 2023년 블랑팡과 협업했다. 이들 역시 초고가 브랜드지만, 모두 같은 스와치 그룹 산하 계열사다. 오데마피게는 그룹 밖 독립 브랜드인데다, 오메가와 블랑팡보다 유구한 브랜드 유산을 자랑한다.
주요 매체들에 따르면 출시 며칠 전부터 뉴욕 타임스스퀘어 매장 앞 줄서기 자리 자체가 200~600달러(약 30만~90만원)에 거래됐다. 시계가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대기 순번이 자산이 됐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매장 앞에서 닷새를 기다린 한 소비자는 WSJ 인터뷰에서 “이건 오데마 피게니까, 결과가 어떻든 똑똑한 투자”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오데마 피게 같은 고가 브랜드가 가격을 직접 낮추는 대신, 브랜드 유산을 잘게 나눠 대중 시장에 유통시키는 방식이 시계업계 안팎에서 정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기 침체 장기화로 소비자들은 수천만 원짜리 고가품 완제품에 지갑을 열지 않는 추세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가 이탈리아명품협회 알타감마와 공동으로 작성한 ‘2025 명품 시장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글로벌 개인 명품 시장은 3580억유로(약 569조원)로 전년 대비 2% 줄었다. 활성 명품 소비자 수는 2022년 4억명에서 2025년 3억4000만명으로 15% 감소했고, 업계 영업이익률은 2012년 23%에서 2025년 15~16%로 떨어졌다. 스위스 시계산업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스와치 그룹 영업이익은 1억3500만스위스프랑(약 2280억원)으로 전년 3억400만스위스프랑(약 5140억원)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16일 스위스 제네바 스와치 매장에 진열된 로얄팝 시계. /연합뉴스
반면 고가 브랜드 로고, 상징적인 디자인, 이례적 협업이라는 서사, 소셜미디어 인증 여부, 리셀(되팔이) 차익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소유하려는 소비자 욕망은 오히려 커졌다. 이 흐름은 시계업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계업계보다 불황을 먼저 겪은 글로벌 패션 업계에서는 대중 브랜드와 고가 브랜드 사이 협업이 일상화됐다. H&M은 칼 라거펠트 협업을 시작으로 베르사체, 발망, 메종 마르지엘라, 시몬 로샤 같은 세계적인 고가 브랜드와 손잡았다. 미국 뉴욕 기반 세계적 스트리트 의류 회사 슈프림은 고전적인 고가 브랜드 버버리, 루이비통과 힘을 합쳐 두 회사 로고가 충돌하는 장면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모두 소비자에게 브랜드 상징을 작은 조각으로 쪼개서 파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로얄팝 대란을 경제적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기에 고가 브랜드들이 대중 접점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불황형 소비 창출 방식이라고 했다. 오데마 피게는 손목시계 대신 포켓워치를 택해 핵심 제품군 가격 권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번 협업 수익 전액은 스위스 시계 제작 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쓰인다. 라우렌트 페리베스타 오데마피게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이 시계 산업에 주목하고, 관심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기 위한 시도”라며 ”무관할 수 있는 카테고리 제약을 넘어 열정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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